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문단 편집) ==== 1930년대 ~ 1940년대 ==== '''1930년 1월 26일 인도 국민회의는 인도의 독립을 선언했다'''. 당연히 세계대전으로 경제가 피폐했던 영국은 인도의 자원과 인구, 시장이 여전히 필요했기에 이 독립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1930년 3월 영국의 '''소금세 제정'''에 반대하는 '''소금 행진 시위'''를 시작했다. 인도로 수입되고 생산되는 모든 소금에 세금을 붙이며 가내 수공업으로 제조하는 소금은 불법으로 규정한다는 것으로 '''인도 경제를 종속시키려는 공작이었다'''. 유사 사례로 소금, 철 등 생활 필수품의 사적인 유통을 금지했던 [[무제(전한)|한 무제]]가 있다. 문제는 한무제도 그렇고 후대의 당나라도 그렇고, 소금세를 시행하면 중앙의 재정은 좋아지지만 소금이 생필품인 만큼 소금을 세금주고 사야 하는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는 가혹한 착취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디 이전에도 소금세가 시행된 경우, 문제가 생기는 일이 많았다. 중국에서는 아예 [[황소의 난|소금밀매업자가 나라를 엎어버리다시피 하기도 했다.]] 이 때 간디는 차라리 바다에서 소금을 가져다먹자며 아흐메다바드에서 단디까지 360km 가량을 행진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 '''61세'''였다. 행진 도중 300명 이상의 시위자들이 경찰들에게 구타를 당했으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중상을 입었다. 시위 이후 영국 정부는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들을 비롯한 '''60,000명 이상의 사람들을 투옥했다'''. 결국 식민지 총독인 어윈 경은 간디와 협상하기로 결정했다. 간디는 영국-인도 원탁 회의에 인도 측 대표로 참석했다. 1931년 3월 '''<어윈 조약>'''이 체결되었다. 어윈 경은 시민 불복종 운동 중단의 대가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는 데 동의했다. 어윈 경의 후임 총독인 윌링던 경은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제하고 진압하는 강경 노선을 취했다. 간디는 불복종 운동으로 감옥에 다시 수감되었고, 영국은 그를 고립시켜서 그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고 했다. 영국의 수상인 [[윈스턴 처칠]]은 간디를 >"힌두 무솔리니" 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간디에 대한 처칠의 비판은 유럽과 미국 언론에 의해 널리 보도되었다. 1932년 영국은 불가촉천민에게 일반 유권자와는 다른 선거권을 주는 '''<커뮤날(Communal) 법안>'''을 추진했다. 간디는 이 법안이 힌두교 사회를 분열시킨다고 판단하여 감옥에서 단식 투쟁까지 하며 반대했다. 그런데 정작 불가촉천민을 대표한 정치인이었던 '''[[암베드카르]]'''는 분리된 계층에게 분리된 선거권을 주는 이 법안에 찬성했다. 암베드카르는 일단 선거권이 주어지는 것 자체에 긍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잇따른 인도 대중들의 반발로 <커뮤날 법안>은 [[암베드카르]]와 간디의 협의하에 [[달리트]](불가촉천민) 계층에게 기존보다 더 많은 의석을 주는 '''<푸나(Poona) 협약>'''으로 대체되었다. 간디는 1933년 인도 내 불가촉천민의 차별 대우를 개선하기 위해 '''하리잔 운동'''을 벌였다. 1934년 인도 국민 회의의 의원직을 사임했다가 1936년 정계에 복귀했다. 차기 인도 국민 회의의 지도자로 '''파트타비 시타라마야'''를 지지했지만 대영 강경파인 '''[[찬드라 보스]]'''가 지도자가 되었다. 간디는 찬드라 보스를 비폭력 저항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고 비판했기 때문에 찬드라 보스와 대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도의 참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인도의 자유가 부정되어 있는 동안 인도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쟁의 당사자가 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캠페인은 인도 대중과 '''[[사르다르 파텔]]''', '''라젠드라 프라사드'''와 같은 인도 지도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실패했다. '''당시 무려 250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이 소집되어 영국군에 합류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영 강경파인 찬드라 보스를 지지했다. 이들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추축국인 일본 제국이 [[임팔 작전]]을 발동하며 인도를 침공했을 때 일본과 협력하면서 [[찬드라 보스]]의 [[자유 인도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인도인들도 있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2년 '''<뭄바이 연설>'''에서 영국에게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며 인도 독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 사력을 다하고 있었던 영국 정부는 인도가 전쟁이 끝난 후에나 독립할 수 있다며 인도의 즉각적인 독립을 거절했다. 이후의 대규모 시위로 영국은 간디를 또다시 체포하여 푸네의 아가 칸 궁전에 투옥시켰다. 수감 중 간디의 오랜 비서와 아내인 카스투르바이가 사망하게 되었고, 간디 또한 말라리아로 고통을 겪게 되었다. 간디의 지지자들은 항의의 표시로 식민 정부가 소유한 수백 개의 철도역과 경찰서를 파괴하거나 불태우고 전선을 절단했다. 간디는 인도 국민들에게 제국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완전히 중단할 것과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말고, 만약 영국 관리들에 의해 폭력이 시작된다면 기꺼이 고통을 받고 죽을 것을 촉구했다. 2년 후인 1944년 5월 6일 건강 악화의 이유로 간디는 석방되었다. 구류에서 풀려난 그는 [[인도 자치령]]과 [[파키스탄 자치령]]의 분리를반대했다. 이 때의 파키스탄 자치령은 현재 [[파키스탄]]인 서파키스탄과 현재 [[방글라데시]]인 [[동파키스탄]]을 전부 포함한다. 간디는 [[파키스탄]]이 자치령으로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도의 이슬람교 지도자인 '''[[무함마드 알리 진나]]'''와 2주 동안 여러 차례 만났고, 이때 간디는 인도 아대륙의 무슬림과 비무슬림이 공존하는 '''인도 연합'''을 주장했다. 하지만 진나는 간디의 제안을 거절했다. 무슬림 동맹은 영국과 협력했고, 간디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분리된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을 요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